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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리버가 예견한 ‘안락사’ 시대

By 김상수

May 14, 2018


걸리버는 럭나그란 나라를 여행한다. 그곳은 죽지 않은 인간들이 사는 나라다. 걸리버는 흥분했다. 항상 꿈꿨던 영생이었다. 그런데, 직접 본 불사(不死)의 삶은 전혀 달랐다. 럭나그 사람들은 영원히 ‘사는’ 게 아니라, 영원히 ‘늙고’ 있었다. 눈은 침침하고 허리는 굽고 기억력은 가물해진다. 몸도 마음도 지친 노인으로 평생을 살아야만 했다. 걸리버가 직접 본 불멸의 삶은 축복이 아닌 형벌이었다. 


   죽는 것보다 슬픈 건 죽지 못하는 것


올해 104세인 호주 최고령 과학자 데이비드 구달이 10일(현지시간) 스위스 바젤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말 그대로 자살(自殺)이다. 하지만, 구달 박사가 택한 건 고통스럽지 않은 죽음. 그는 전날 ‘자살 기자회견’을 열었다. “베토벤 교향곡 9번을 마지막 순간에 듣고 싶군요.” 


구달 박사는 고령까지 활발한 연구활동을 벌였지만, 최근 수년간 급격히 건강이 나빠졌다. 혼자선 생활하기 힘든 지경이 됐다. 그렇다고 불치병에 걸린 건 아녔다. 삶을 이어갈 순 있지만, 구달 박사가 생각하는 삶은 아녔다. “건강이 더 나빠지면 지금보다 더 불행할 것 같다.”

구달 박사는 안락사가 합법화된 스위스를 찾았다. 구달 박사는 스스로 정맥 주사가 연결된 밸브를 열었다. 그리고 그는 원하는 대로 편안히 죽음을 맞이했다. 구달 박사는 말했다. “죽는 것보다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게 진짜 슬픈 일이다.” 무려 1726년. ‘걸리버여행기’에서 걸리버는 이를 예견했었다. 삶의 가치는 ‘길이’가 아닌 ‘깊이’라고 말이다. 


   안락사, 개발은 끝났다 


최근 호주의 안락사 활동가 필립 니슈케 박사는 안락사 캡슐을 선보였다. 캡슐에 들어가 버튼을 누르면 질소로 죽음에 이르는 기계. 약간의 어지럼증만 견디면 곧바로 죽음에 이를 수 있는 기계다. 이 박사는 “언제 어떻게 죽을지 선택하는 것도 인간의 기본권”이라고 주장한다.

안락사 논쟁은 100년 이상의 역사를 갖고 있다. 미국은 1906년에 안락사 법안 발의가 처음 이뤄졌다. 세계 첫 안락사협회가 창설된 것도 1935년. 안락사 허용 여부는 오래된 인류의 숙제였고, 아직도 풀지 못했다. 


   한국은?

연명의료결정법이 어렵사리 국회 문턱을 넘어 올해부터 시행되고 있다. 현재까지 3000명 이상의 환자가 연명의료를 중단하고 죽음을 선택한 것으로 집계됐다. 현재 연명의료결정법에 따르면, 치료로 회복 가능성이 없을 때 연명의료를 받지 않겠다는 계획서를 환자가 작성하거나 혹은 환자가 이를 사전에 작성하지 못했을 때 가족 의사에 따라 연명의료를 중단할 수 있다. 배우자, 직계 존ㆍ비속 등 모든 가족의 동의를 얻어야만 한다.

다만, 연명의료를 중단해 죽음에 이르는 건 구달 박사의 사례처럼 적극적으로 죽음을 택하는 존엄사와는 구분된다. 때문에 일각에선 이 법을 ‘존엄사법’ 등으로 부르는 데에 반대하는 의견도 상당하다. 말 그대로 연명의료를 중단했을 뿐 이게 곧바로 죽음과 이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현 연명의료결정 절차가 비현실적이란 지적도 있다. 시행 초기 단계에서 사전에 계획서를 작성하지 못한 환자가 다수인데, 무연고ㆍ무의식 환자는 가족 동의 절차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dlcw@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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